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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꼬꼬무 시즌3

꼬꼬무 판문점도끼만행사건 정리 공동경비구역JSA sbs 목요일 예능

by bullhak 2022.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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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76년 8월 21일 파주 이른 아침부터 수십 명의 군인들 이탄 군용차가 비무장지대 DMZ로 들어간다. 이들이 받은 임무는 북한 괴뢰군을 처치하는 것이다. 이 군인들은 대한민국 공수부대 특전사이다. 이들은 특전사 중에서도 특별 선발된 최정예 대원으로 모두 64명이다. 특전사들은 작전지인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도착했고 다들 일사 분란하게 움직였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휴전 협정 이후 남북한 포로 교환이 이루어진 휴전선에 위치한 다리이다. 한번 넘어가면 돌아올 수 없어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 불리게 되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이병헌이 오가던 다리가 바로 이 곳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휴전선에서 유일하게 남북한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곳이다. 가운데 선 이하나 있는데 이선을 넘으면 월북, 월남한 것으로 간주하여 충돌 혹은 피격을 당할 수 있다. 그런데 예전에는 선이 없었고 자유롭게 돌아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선이 없던 당시 분위기는 서로 담배도 나누어 피고 인증샷도 찍을 정도로 사이가 좋아 보였다.


1976년 당시 JSA 경비대대에 근무했던 배재복씨는 이북에 자신을 형~ 형~ 하며 따르던 친구가 준거라며 사진을 보여준다. 자신을 따르던 북한 병사가 사진을 찍어서 선물로 보내준 것이다. 그런데 사진뒤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북쪽 친구로부터 광복을 위하여" 그런데 이 선물을 받고 10일 만에 분위기가 180도 바뀌게 된다. 북한군을 눈에 띄는 데로 죽이라는
명을 받은 결사대 64명이 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어제까지 담배를 나눠피던 북한 친구들을 갑자기 죽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왜 이런 작전을 명령한 것일까? 작전이 시작되기 3일전 전쟁 직전까지 갈뻔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3교대 근무를 하고 쉬는 날이었던 그날 동기인 전병호 상병과 배재복 상병은 외출 준비로 마음이 들떠있었는데 갑자기 사이랜이 울리며 비상이 걸린다. 이유는 나무를 절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절단해야하는 나무 위치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앞에 위치한 유엔군 3초소였다. 3 초소는 사방에 북한 초소로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리가 있었다. 바로 최 최전방으로 별명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초소다. 밤에는 북한 군에게 납치당할까 봐 보초를 서지도 않았고 대신에 5 초소에서 망원경으로 감시를 했다.

 

미루나무에 가려진 이동경로

 


문제는 3초소 앞에 있는 미루나무가 너무 커서 시야를 가리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 노동자 5명과 미군 중대장, 소대장의 지시아래 한국군 미군 총 11명이 주변을 지키고 가지 치를 하기로 한다. 오전 10시 30분 미루나무 가지치기가 시작되었다. 얼마지나지않아 지프차 한대가 다리를 건너 이쪽으로 온다. 그들에게 온 사람은 악명 높은 북한군 박철 중위이다. 그는 독종 중에 독종으로 별명은 불도그이다. 박철의 군화에는 3개의 침이 박혀있었다. 누군가와 시비가 붙으면 침이 박힌 구두 앞발로 걷어차고 마구 짓밟았다고 한다. 공동경비구역에서 사고가 났다하면 그 중심에는 항상 박철이 있었다.

박철 중위


한 번은 미군 장교가 북한군한테 맞아서 목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다. 1975년 6월 핸더슨 소령 폭행 사건이었는데 주동자가 박철이었다. 박철이 주변을 쓱 둘러 보고는 "어이 동무들! 나뭇가지만 치는 건가?"라고 말하고 아무 말 없이 돌아가자 11명의 사람들은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박철도 나이 먹으니 철이 들었구나"라고 생각하고 가지치기 작업을 다시 진행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박철이 부하들을 잔뜩 데리고 나타났다. "너 이 간나 새끼들 우리가 심은 나무인데 너네가 왜 잘러? 당장 그만 두라" 라며 방해를 한다.


3 초소에 있는 미루나무는 원래 있었고 평소 가지치기도 했었기에 미중대장 보니파스 대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작업을 진행시킨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전부 다 죽여버리갔어!"라며 사다리를 막 흔들며 겁을 주었다. 북한군은 이렇게 하나둘씩 총 30명이 모였다. 남한 쪽은 11명 11대 30 배상병과 전상병은 긴장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낮익은 얼굴 하나가 보인다. 형~형~하며 따랐던 북한 병사가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그 친구와 눈이 딱 마주치고 배상병이 평소처럼 말은 건다. "분위기 왜 이래?" "너희 무슨 일 있어?" 북한군 친구는 고개를 스윽 돌리며 시선을 피한다. 바로 그 순간 박철이 손목시계를 풀더니 손수건에 감싸 주머니에 넣는 것이다. 다른 병사들도 손목을 걷었다. "다 죽여버려" 북한군의 기습 공격이 시작되었다.


북한군은 못이 박힌 몽둥이로 남한군을 무차별 폭행했다. 배상병은 순간 쓰러지면 여기서 죽는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한 북한 군이 손에 도끼를 들고 배상병의 머리를 내려 찍었다. 다행이 헬멧을 쓰고 있어서 목숨을 건졌으나 충격으로 머리가 띵한 상태였다. 배상병은 권총을 꺼내들어 사격을 하려는 순간 여기는 최전방이고 사격하는 순간 미사일 대포를 쏘며 전쟁이 터질 것이란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는 다시 권총집에 권총을 넣었다. 한 쪽에는 미군 중대장 보니파스 대위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도끼에 맞은 것이다.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 머리가 축구공, 농구공처럼 크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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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중대장을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이송한다. 그리고 곧장 5분대기조가 출동한다. 북한군은 이미 다리를 건너 도망친 상태였다. 다리 넘어는 북한이라 쫓아 갈 수가 없었다. 사건 현장을 수습하는 도중 하나의 시신을 발견한다. 미군 소대장 배럿 중위였다. 먼저 후송된 보니파스 대위도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 한다. 보니파스 대위는 귀국을 이틀 앞두고 있었는데 미루나무 가지치기 임무가 마지막 임무가 된 것이다.


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바로 다음날 미군은 북한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범죄행위를 인정하고 관련자를 측각 처벌하라"
"이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립네까?"
"이 도끼 애초에 누가 들고 왔습네까?"
"미군 아닙네까?"
"이 도끼가 미군이 먼저 공격했다는 증거 아닙니까?"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사과는커녕 적반하장을 한다. 미군 장교가 두명이나 죽은 사건이다. 일본에 가있던 주한미군 사령관 리처트 스틸웰이 소식을 듣고 바로 전투기를 타고 서울로 온다. 첫 번째 조치로 전군에 데프콘3가 내려졌다. 전쟁을 준비하라는 신호이다. 미국은 이번에는 절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북한은 모든 책임과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것 이라며 단호한 입장을 내비쳤다.


일본에 있는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서 F-4 팬텀 전투기가 줄줄이 이륙하기 시작한다. 무려 24대 F-4 팬텀 전투기는 베트남전에서 맹활약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전투기다. 별명은 공산군 전투기 잡는 도깨비이다.
그리고 미국 본토에서는 F-111전폭기 20대가 출격해 논스톱 비행을 한다. 별명은 죽음의 신 '사신' 초저공비행으로 레이더도 피해가 생긴 별명이다. 괌에 있는 미군기지에서는 핵폭탄과 폭탄 31톤이 탑재 가능한 B-52 전략폭격기 3대가 출격한다.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도 한국으로 출격했고 미군 해병대 1800명이 이동을 시작했다. 육해공이 총동원된 것이다.


이 상황을 지켜본 김일성은 바로 전쟁준비 명령을 내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가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 우리가 언제나 그들로부터 일방적으로 도발을 당하고만 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미친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미 사령관은 보복작전 계획을 짜서 백악관에 보고를 하고 폴 버니언 작전을 실행하라는 승인을 받아낸다. 폴 버니언은 큰 도끼로 나무를 베는 미국 전설 속 나무꾼의 이름이다. 폴 버니언 작전은 도끼 만행 사건의 발단인 미루나무를 잘라내는 것이었다. 이 작전의 숨은 의미는 사건이 발생한 20년 뒤 미국이 공개한 비밀문서에서 밝혀졌다. 공동경비구역 내 북한군 막사 공격하고 비무장 지대에 있는 북한군의 국경수비대의 막사를 무력화시킨다. 나무를 자를때 북한이 우리를 공격하면 북한군 막사를 포격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이 반격을 하면 모든 화력을 총동원해서 북으로 밀고 올라가겠단 것이다. 휴전선을 연백평야까지 끌어올리겠단 계획이었다. 이에 북한이 전면전을 개시하면 핵폭탄을 사용할 계획이었다.


다음은 주한미군 참모총장의 회고록의 한 내용이다.
"전쟁이 발생할 확률은 50대 50이었다. 한시간 뒤면 수천수만 명의 병사들이 전투를 할 것이고 가파른 경사에서 죽어가 산을 피로 물들일 것이다. 만약 북한 공산군이 서울을 중화기로 공격한다면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핵무기 사용을 요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루나무 한그루가 불러온 나비효과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운명의 그날 아침 9시 공동경비구역 JSA 미군 공병들이 미루나무를 자르기 시작했고 한국군은 3초소 돌아오지않는 다리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이들은 JSA 경비대원으로 위장한 특수부대원들이었다. 최정예 64인의 결사대 이들의 공식 임무는 나무를 자르는 미군을 보호하라 하지만 미군이 모르는 비밀 임무가 하나 있었다. 일명 독수리 작전 "북한군은 보이는 대로 다 죽여라"


박 대통령의 지시였다. 왜 미군 몰래 지시를 내렸을까? 원래 미국은 단독 작전을 계획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박 대통령은 "엄연히 우리나라, 우리 땅에서 벌어진 일이니" "우리가 최일선을 맡겠소"
주한미군 사령관 리처드 스틸웰은 흔퀘히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태권도 잘하는 병사들을 선발해 주십시오" 왜 총이 아닌 태권도였을까? 당시 미국 내에서는 반전여론이 힘을 받고 있었고 미 대통령 선거가 코 앞이었다. 재선을 준비하는 포드 대통령은 민심을 얻어야 했었다.


미군 장교 2명이 죽은 사건이기에 가만히 있을 수많은 없었고 무언 가 보여 줘야했기 때문에 전투기와 항공모함등을 출격시킨 것이다. 북한에게 겁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총이 아닌 태권도를
택한 것이다. 총격전이 벌어지면 전쟁이 터지기 때문이었다. 결사대의 손에는 총 대신 곡괭이 자루가 쥐어졌다.


그런데 출동전에 총기를 소지 하란 지시가 떨어진다. 미군 몰래 총기와 수류탄을 방탄조끼와 트럭에 숨겼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에서 트럭이 다가왔는데 100여 명이 넘는 북한군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북한군 한명이 상기된 얼굴로 미루나무 근처로 다가왔다. 거의 근접하게 접근한 그는 걸음을 멈추고 현장을 노려보고는 다시 돌아갔다.
바로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미루나무가 쓰러졌다. 이제 철수만 하면 폴 버니언 작전은 안전하게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64인의 결사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대검을 들고 대원들이 북한군 초소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초소문을 박차고 들어가 북한군을 죽이려 했는데 초소에 아무도 없었다. 주변 북한군 초소에도 아무도없었다. 그날 북한은 초소에 인원배치를 하지 않은 것이다. 결사대는 화가난 나머지 북한군 초소에 있는 물건들을 다 부셨다. 북한은 끝까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무사히 두 개의 작전은 종료된다.


김일성은 이번 사건이 일어나 유감이라며 메세지를 보냈고 미국은 이 메세지를 받아들였다.
그날 이후 공동경비구역에는 작은 콘크리트 선이 생겼다.


1989년 11월 동,서독 시민이 힘을 합해 무너뜨린 베를린 장벽
최근 남북 정상이 손을 잡고 나란히 콘크리트 선을 쉽게 넘은 것처럼 빨리 선을 지우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출연진 : 장성규 ,장현성, 장도연
게스트 : 정용화, 한승연, 김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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