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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꼬꼬무 시즌3

꼬꼬무 기네스북에 등재된 우범곤 총기 난사 사건 sbs 목요일 예능

by bullhak 2022.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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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82 4월 26일 39년 전 당시 실제 마을의 모습이다.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있고 앞에는 강이 흐르는 오지 중에 오지 6.25 전쟁 당시 인민군도 못 찾았다는 산골마을이다. 

그날 밤 마을 곳곳에서 모인 사람들 반상회 날이었다. 마을 주민인 전원배씨도 참석을 했다.
도란도란 이야기도중 갑자기 밖에서 탕 탕 탕 총소리 들려왔다. 의문의 총소리에 사람들은 겁이 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헉헉 거리며 뛰어 들어와 우체국 전화 교환원인 원배씨의 여동생이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밖에선 계속 총소리가 났지만 원배씨는 죽기를 각오하고 우체국으로 달려간다.


사건 현장인 우체국에는 원배씨의 여동생만 죽은게 아니라 같이 근무하던 교환원과 집배원 모두 사망한 것이다. 외부와 통신을 끊기 위해 의도적으로 살인을 한 것이다. 궁류 우체국 바로 앞에는 궁류지서(지구대)가 있었는데 이곳도 피해를 받았다. 모든 통신이 단절된 상태가 된 것이다.



또다시 총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곳은 압곡리 600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곧이어 '쾅' 하며 수류탄 터지는 소리까지 난다. 1970~89년까지 무장공비가 300번이나 내려왔던 시절이었기에 마을 주민들은 무장공비가 내려왔다고 생각했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양어깨에 총을 메고 허리에 수류탄을 찬 건장한 남성 한 명이었다고 했다. 그는 불 켜진 집만 노렸다.
이사실을 안 마을 주민인 택시기사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불을 끄라고 지금 불안 끄면 다 죽는다고 소리쳐 알렸고 이 말을 듣고 불은 끈 집은 모두 생존했다. 그런데 불을 끄지 않은 한 집이 있었는데 그 집 가족 5명 모두 참사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택시기사는 골목길에서 범인을 마주쳐 안타깝게 사망하고 만다.

한 시간도 채 안된 시간에 발생된 살상된 사람은 19명
범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운계리
현재 참사가 일어난 사실을 모르는 운계리 주민들은 모두 잠든 상태였다. 늦은 밤 이곳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구멍가게에서 양어깨에 총을맨 한 남자가 사이다를 달라고 하는데 여자인 사장님은 서슴지 않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이유는 그가 이 마을에 근무하는 순경이었기 때문이다. 음료수를 다 마신 그는 여사장과 아이들을 총으로 죽이고 만다.

 

그의 이름은 우범곤 27세 순경이다. 태권도 3단, 합기도 3단 에 특기는 사격이다.
우순경은 서울시경에서 근무하다가 궁류지서로 발령을 받았다. 서울에서 재직 당시 그는 꽤 잘 나갔던 경찰이었으나 사고를 쳐 좌천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려온 지 한 달 만에 25살의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얼마 안돼 둘은 교제를 시작했으나 전 씨의 가족은 둘의 교제를 결사반대했다. 이유는 술을 마시면 개로 변하는 우 씨의 안 좋은 술버릇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은 동거를 시작한다.


그렇게 2개월이 지나고 우순경은 야간근무 끝난 후에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우순경의 가슴에 파리가 앉는 것이다. 
전 씨는 파리를 쫓기 위해 우순경의 가슴을 탁 쳤는데 격하게 화를 내며 둘은 싸우게 된다. 지서에 출근해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그는 근무지에서 소주 2병을 마신다. 술만 마시면 개가 되는 그는 집에 돌아와 전 씨를 폭행했고 이를 말리던 이웃 주민에게도 폭행을 행사했다. 그리고 잠시 뒤 봉변당한 이웃의 아들이 찾아와 전 씨에게 따졌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거들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은 우 씨는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고 모두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는 지서 무기고에서 소총 2자루와 수류탄을 챙긴다. 이때가 밤 9시 반이었다. 그러고 나서 우체국에서 통신을 차단하고 걸어가다 마주치는 사람이 있으면 조준사격을 해서 죽이고 시장통에 수류탄을 던지는 등 잔혹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압곡리 9명, 운계리 17명 사망


밤 12시 평촌리에 도착한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상갓집이었다. 문상객들은 총을 메고 수류탄을 찬 그의 모습을 보고 아무도 살인자라 의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문상을 온 줄 알고 술상을 내왔다. 바로 그가 경찰 정복을 입고 있었고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우순경은 갑자기 심한 욕설을 퍼부었고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가는데 어디선가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돌아와 아기를 죽이고 간다. 평촌리에서만 23명이 사망 20명이 부상을 당했다.

터벅터벅 걸어가던 중 그는 서 이병을 만난다. 총격의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 서 이병은 사람들이 총소리에 놀라 자신의 집에 지금 모여있다며 우순경을 사람들이 모인 장소로 데려간다. 이때가 새벽 1시 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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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새벽 1시까지 경찰이 출동하지 않은 걸까??
궁류지서는 전국에서 가장 작은 지서에 속했고 인원은 4명 지서장, 차석, 순경 2명뿐이었다. 사건 당일 지서가 텅 비어 있었는데 지서장과 차석은 동네 유지들에게 온천에서 접대를 받고 있었다. 밤 10시 10분 지서장과 차석이 마을에 복귀하자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와 우순경이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있다며 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설명해 줬다. 이 말을 들은 둘은 무기고에서 총을 챙기고 범인의 진행방향과 반대방향으로 향한다. 지서 바로 옆 면사무소에는 마을 전체에 방송을 할 수 있는 마이크가 있었는데 이 둘은 주민들에게 위험한 사실을 알리지도 않고 자신들의 안전만 생각했다. 직무유기를 한 것이다.


궁류면에서 1시간 거리에 의령경찰서가 있다. 의령경찰서에 처음 사건 신고가 된 것이 10시 반이었다. 한 주민이 의령경찰서로 전화를 한 것이다. 통신이 차단된 줄만 알았던 우체국에 어떻게 전화가 사용 가능했는지 그 이유는 교환원 직원이 죽기 전 사력을 다해서 통신 연결을 해 놓은 것이다.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자신의 임무를 다한 것이다. 이 교환원은 전원배 씨의 여동생 전은숙 씨이다.


의령경찰서에서 바로 출동을 하면 상갓집 참사는 막을 수 있었는데 출동을 하지 않는다. 무기고가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열쇠를 관리하는 담당자가 술 마시러 나간 것이다. 뒤늦게 열쇠 담당자를 찾아 무기고를 열어 어찌어찌 출동을 했다. 기동타격대가 마을에 도착한 시각 12시 10분 이 시각 우순경은 평촌리 상갓집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기동타격대는 상갓집으로 향하지 않았고 운계리에 있는 봉황교와 궁유교에 숨어 매복을 하고 있었다. 현장에 책임자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책임자인 경찰 서장은 부산에 있었고 뒤늦게 연락을 받은 서장은 새벽 1시 30분 현장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한 후에 조치를 취하지 않고 상부에 보고만 할 뿐이었다.


새벽 3시 30분 2시간 동안 총성이 없자 이제야 경찰들은 현장으로 투입하기 시작했다. 우순경의 위치는 여전히 서 이병의 집 그곳의 사람들은 아직도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 자동차 한 대가 라이트 빛을 내뿜으며 나타났다 경찰차였다. 그것을 본 우순경은 급히 방으로 들어갔고 얼마 뒤 방 안에서 쾅 소리와 함께 수류탄이 터진 것이다. 방안에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모두 사망하였다. 이 사건으로 사망한 사람은 56명 부상당한 사람은 34명으로 사상자가 90명이다. 우범곤이 가져간 총탄 144발 회수된 탄환은 단 9발 136발을 사용하여 1.6발에 한 명씩 치명상을 입혔다. 경찰들은 총을 단한발도 쏘지 않았고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한 사람이 저지른 최다 연속 살인으로 기네스 북에도 올랐다


사건 이후 기사에는 그의 근무지를 특수 근무처라 표기했는데 101 경비단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청와대가 언급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최초 신고 시 간이 10시 35분으로 기사가 나자 한 마을 주민이 자신이 더 일찍 신고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통신이 차단되자 자신이 차를 타고 가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이때가 10시 5분이었다고 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경찰서 상황일지를 확인하려 했는데 상황일지가 찢어져 있는 것이다. 찢어진 이유는 담당 경찰관이 기록 잘못으로 2장을 찢고 다시 기록했다는 것이다.

7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을 전두환 대통령은 82년부터 규제를 풀기 시작했다. 두발자유, 교복 자유, 야간 통행금지 해제, 프로야구 개막을 하는 등 민심을 얻기 위해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우순경 사건이 터진 것이다. 전두환 정부는 빠르게 후속조치를 취했다.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사람들은 이 사건을 잘 몰랐는데 이유는 일주일 만에 기사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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