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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꼬꼬무 시즌3

꼬꼬무 전태일열사 평생동안 약속을 지킨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sbs 목요일 예능

by bullhak 2022.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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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70년 11월 13일 오후 2시 30분 다급하게 택시를 찾는 한 남자가 쌍문동으로 빨리 가자고 한다. 그의 이름은 김영문 씨 20살 청년이다. 위독한 친구의 비보를 전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가야 하는 상황 이었다. 쌍문동에 도착한 택시 영문씨는 맞은 편에 오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 이 막혔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마치 무언가 알고 있는 듯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병원으로 향한다.

병실 문을 열자 물을 찾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탓에 아들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 만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제 5분, 10분 있다 죽을지 모르니까 꼭 약속 해야 해요"

김영문 씨와 친구들은 같은 곳에서 일하는 재단사였다. 이 세 친구가 일하는 장소는 동대문 평화시장 60~70년대 패션의 메카였던 곳이다. 이 시기는 맞춤옷에서 기성복으로 전환하던 시기로 전국 기성복의 70%가 평화시장에서 만들어졌다. 평화시장의 1층은 매장, 2층,3층은 봉제공장으로 그 수가 400여 개나 되었다. 일자리를 찾아 시골에서 많은 청년들이 평화시장으로 몰려왔다.

이 세친구의 꿈은 자신들의 매장을 차리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들의 인생을 바꿀 친구를 만나게 된다. 그는 눈동자가 살아있고 자신만만하고 재치 있는 친구였다고 한다. 어느 날 그 특출 난 친구가
"나 지금 방송국 간다"
"시간 있으면 같이 갈래?"
세친구와 함께 방송국으로 향한다. 방송국에 도착한 그는 "고발할 게 있습니다. 평화시장이 작업환경이 너무 열약합니다" 라며 자신이 일하는 직장을 내부고발한다. 방송국에서는 자료가 충분치 않다며 자료를 확보해서 다시오라며 그들을 돌려보낸다. 보란 듯이 퇴짜를 맞았지만 친구들은 그의 당당함에 반하게 된다. 그는 열명이 넘는 제단사들을 다방에 모아놓고 실태조사를해서 작업환경을 바꿔보자며 사람들을 고조 시켰다. 그는 노동운동의 상징 전태일 이었다. 전태일의 리드로 의기투합한 친구들은 실태조사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실태조사를 해보니 현장은 참담했다. 평화시장 1층 매장이 있는 곳은 매우 깔끔했으나 2층, 3층 공장 내부는 어두컴컴하고 어지러울 정도의 석유 냄새와 한두 시간만 일해도 눈썹이 하얘질 정도로 먼지가 많았다. 이곳에는 무려 10000명이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단 하나의 환풍기도 없었다. 더 많은 사람이 일 할 수 있도록 복층으로 개조했고 2평에 13명이 근무하고 7평에서 30명이 일을 했다.

사람들은 이곳을 닭장이라 불렀다. 당시 여공들에게 받은 설문지가 있는데 근무시간이 8시~23시까지 14간 이상 근무했는데 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쉬는 날은 한 달에 이틀 쉬었다고 한다. 명절에는 바뻐서 쉬지도 못한다고 한다. 가장 최악의 대우를 받았던 사람은 '시다' 였다. 연습 공인 시다는 재료 운반, 다림질, 심부름, 잡일을 도맡아 했으며 하루 14시간 무릎을 꿇고 일했다. 시다는 대부분 어린 소녀들이었다. 적으면 12살 많으면 15살 대부분 집안이 어려워 돈을 벌면 집으로 보내주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며 일주일에 약 100간 근무를 했는데 월급이 1800~3000원이었다. 그때 당시 짜장면 가격이 100원 으로 하루 일당이 짜장면 한 그릇 값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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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다들을 안타까워했던 전태일은 자신이 싸온 도시락을 시다들에게 주고 자신은 굶었고 자신의 버스비로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집까지 걸어가곤 했다. 전태일이 이렇게 까지한 이유는 순덕이 때문이었다. 순덕이는 전태일의 여동생이다. 2남 2녀의 장남으로 12살부터 가장 노릇을 한 그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어머니는 식모살이하러 서울에 간다. 그러던 어느날 4살짜리 순덕이가 계속 엄마를 찾았다. 15살의 전태일은 순덕이를 업고 무작정 서울로 찾아간다. 동생은 배고프다고 하고 돈은 없고 결국 남대문시장 길거리에서 순덕이와 노숙을 한다. 

다음날 바로 그는 순덕이를 업고 신문팔이를 시작한다.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어느날 순덕이가 병에 걸리게 된다. 이렇게 두다간 순덕이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던 16살의 전태일은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에 순덕이를 내려놓고
"순덕아 오빠가 저기가서 밥 얻어올게 다른 데 가지 말고 기다려"
그렇게 동생을 두고 눈물을 흘리며 도망 친다. 미아보호소에 가게 되면 밥 굶지 않고 따뜻한 곳에서 잘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다시 동생을 놓고 온 곳으로 돌아가 동생을 업고 보육원에 맡긴다. 그리고 그는 닥치는대로 일을 시작했다. 낮에는 구두닦이 저녁에는 신문배달, 담배꽁초를 주워서 팔았다. 밥은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구두통 매고 평화시장 앞을 지나가는데 무언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것은 봉제공장 구인광고였다. 그는 바로 그곳에 시다로 취직한다. 얼마 후 온 가족이 다시 한집에 살게 되었는데 쌍문동 208번지 공동묘지가 있는 판잣집이었다.



전태일은 부지런하고 손재주도 좋아 남들보다 빨리 시다를 때고 재단사가 되었다. 어느날 앞에 앉은 여공이 손을 가리고 기침을 하는데 그 손에 검은 피가 묻어 나왔다. 그걸 본 태일은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고 여공은 사장님에게 알리지 말라며 여기서 쫓겨나면 우리 식구 다 굶어 죽는다고 하는 것이다. 태일은 돈을 마련해서 여공 몰래 병원에 데려갔다. 진단결과 폐가 이미 다 망가졌다는 것이다. 평화시장에 이런 각혈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영양실조, 과로, 섬유먼지 때문이었다. 결국 병에 걸린 여공은 해고가 된다.

전태일은 이렇게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사람들을 보며 낙심하고 있던 찰나에 어느 책에서 한줄기 빛을 발견한다. 바로 근로기준법 해설서였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태일은 전부 한자로 된 책을 한글자 한 글자 사전을 찾아가며 책을 읽었다. 그는 어렵게 책을 읽다가 근로기준법 [42조]를 보고 소름이 쫙 돋았다고 한다. 근로시간에 관한 내용으로 1일 8시간 일주일에 48시간을 근로시간으로 한다는 내용이다. [45조] 휴일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하여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에 유급 휴가를 주어야 한다. [55조] 13세 이상 15세 이하의 근로시간은 1일 7시간 1주일에 42시간을 초과하지 못한다. 
어린 시다들에게 야근을 시키는 것은 불법이었던 것이다.

전태일은 진정서를 만들어서 노동청을 찾아갔으나 노동청 사람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근로감독관을 만나고 방송국에도 제보를 했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노동자를 선동하고 다닌다며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었고 소문이나 취업도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노동청에서 거절당하고 나오는데 노동청 앞에 기자들이 쫙 서있었다.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기자들에게 달려가 하소연하였다. 그러자 기자가 자료를 정리해서 가져다 달라 요청했고 그렇게 기사가 실려 평화시장의 실태가 드러나게 된다.

기사가 실린 후 일주일만에 노동청에서 찾아왔다. 1주일 내로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겠다는 것이다. 실태조사 후 위반업체들을 다 고발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 이틀 일주일이가도 캄캄 무소식이었다. 전태일은 친구들과 노동청 국정감사기간에 시위를 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이 정보가 경찰에게 새어나간 것이다. 노동청에서 시간이 좀 걸리니 기다려 달라는 것이다. 전태일과 친구들은 속는 셈 치고 기다리기로 결정한다. 몇칠뒤 노동청에서 식사를 초대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난 뒤 사람들의 태도가 180도 변했다. 전태일과 친구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요구사항을들어준다고 했다가 갑자기 말을 번복한 것일까? 식사를 마쳤을 때 국정감사가 끝난 것이다. 태일과 친구들이 사고를 칠까 봐 시간을 질질 끌며 감사가 끝날 때까지 잡아놓은 것이었다.

태일의 다음 계획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이었다.
11월13일 평화시장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미리 정보를 입수한 시에서는 경찰과 협조해 경비를 배치해 두었다. 태일과 친구들은 작전을 개시했다. 휘발유통, 플래카드, 솜뭉치 시위물품을 챙겨서 3층 비상구에 집합했다. 작전 개시 10분 전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이미 소문이 퍼진 것이다. 평화시장 개장 이래 처음 있는 시위였다. 5분 전 플래카드를 챙겨 내려가는데 누군가 전태일을 확 덮쳐 시위 도구를 빼앗아갔다.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하게 된 것이다. 태일은 그대로 계단에 주저앉아 한참 생각하더니 친구들에게 "너희들 담배가가에 내려가 있어라" 라고 하는 것이다. 태일은 한참을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는데 바로 그때 검은 바바리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내려오는 것이다. 전태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손짓을 하며 친구인 영문 씨를 부른다.

영문 씨가 한걸음 두 걸음 다가가자 바로 그때 갑자기 불길이 확 솟으며 전태일 몸에서 불이 솟아난 것이다. 휘발유를 뿌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렇게 태일은 몸이 불타오르는 상황에서 근로기준법 책을 꺼내들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라며 몸부림치며 사력을 다해 외치는 것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그러고는 쓰러진다. 친구들은 테일에게 달려들어 불을 끄고 몸에 붙은 옷을 제거 하고 소화기로 불을 껐다. 이미 얼굴과 몸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 타버린 상태다. 그런데 다시 일어서서 외치기 시작한다.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쓰러졌다.

전태일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고 친구들은 태일의 말을 피로 한글자 한 글자 적어 외쳤고 경찰들은 곤봉으로 내리치며 시위를 저지했다. 어머니는 병원의사에게 "아무리 비싼 약이라도 상관없으니 제발 우리 아들을 살려주세요" 라며 애원했다. 태일은 그런 어머니를 말리며 

"어머니 저는 살 수 없어요"

"시간이 없으니 제말 똑바로 들으세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비가 와서 흙탕물에 빠져서 이만큼만 남아서 

숨만 쉬고 있는데 그걸 누가 건져주겠는가 그걸 보고 내가 살 수 없으니까 

내 목숨 하나 바쳐서 창 구멍을 하나 내놓고 있을 테니까
노동자와 학생들이 저 창구멍을 보고 막~ 소리지르면서 갈 때 

엄마는 앞장서서 같이 소리 질러줘야 해요"
"엄마 내가 지금까지 한 말 약속 다 지키겠어?"

 

"지킨다"


"노동자하고 학생들하고 싸우면서 햇빛이 비치는 창구멍을 쳐다보고 열심히 뛰어갈거지?"

 

"뛰겠다"


"왜 크게 대답 못하세요! 크게! 크게! 엄마 크게! 대답 크게!"


"그래 이 몸이 다 닳도록 내 몸이 가루가 돼도 너하고 약속한거는 절대로 지킬 거다!"

 


약속을 받은 태일은 혼수상태에 빠진다. 마지막 태일의 한마디 "배가 고파요" 이 말을 끝으로 숨을 거둔다. 이후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매스컴에 전태일의 분신 기사가 계속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졌고 노동현실이 얼마나 비참하길래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특히 대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시위의 반향이 대학가로 퍼지기 시작했다.

여파가 커지자 노동청 관계자들과 평화시장 업주들이 찾아와 빨리 장례를 치뤄 장례식을 끝내자고 요구했다. 어머니는 태일이의 뜻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장례를 치루지 않을 것이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며칠 후 그들은 어머니에게 "남은 아이들도 잘 키우셔야죠"라며 돈이든 큰 가방을 건넸다.
어머니는 남은 3남매를 불렀다. 

"저기 책상위에 있는 파란 가방 봤니?"

"봤어요"

"그 안에는 돈이 가득 들어있다" "저 돈을 받을지 말지는 너희들이 결정해야 해"

"엄마 이 돈을 받으면 어떻게 돼요"

"저돈을 받으면 우린 더 좋은 집으로 갈 수 있어 더 이상 공장에 안 다녀도 되고 대학도 갈 수 있어" "대신 오빠는 잊어버려야 돼 오빠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거야"

"그러면 이 돈을 받지 말고 제가 공장에 계속 다닐게요"

아이들의 뜻에 따라 돈을 거부한 어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청 사람들이 어머니에게 계속 가방을 건내자 어머니는 돈가방을 공중에 뿌리면서 "돈 좋아하는 놈들 다 가져라 우리는 돈 필요 없다.아들의 뜻을 이루겠다" 라고 외쳤다. 그 뒤에도 끊임없는 협박과 회유가 이어졌지만 어머니는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에는 평화시장에 노동조합을 만들겠다고 노동청장이 약속했다. 그러고나서 1970년 11월 18일 장례식이 치뤄졌다. 어머니는 그제야 목놓아 울었다.

태일이 죽고 14일 후 평화시장 옥상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 청계피복 노동조합 현판이 걸렸다. 어머니는 행상을 하며 노동조합에 활동비를 보태고 친구들은 밥을 굶어가며 열심히 일했다. 노조의 주 임무는 밀린 임금 회수, 야학 개설 등이 있었다. 그런데 그중 가장 힘든 일은 일요일에 쉬는 것이었다. 끈질긴 협상 끝에 친구들은 업주들에게 매주 일요일은 쉬겠다고 약속을 받아낸다. 그런데 업주들은 약속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일요일마다 공장을 돌아다니며 감시하고 설득하고 그래도 안되면 전기를 내렸다. 1981년 1월 친구들은 청계피복 노조가 해산할 때까지 10년간 노동자를 위해 싸웠다.

아들 사망 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간 이소선 어머니, 사망한 노동자의 빈소에는 늘 어머니가 계셨고 노동자들의 시위 현장 맨 앞에는 항상 어머니가 있었다. 이소선 씨는 아들과의 약속을 평생 지키고 2011년 신태일의 곁으로 가셨다.

 

출연진 : 장성규 ,장현성, 장도연
게스트 : 오마이걸 효정, 차선우, 정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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