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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꼬꼬무 시즌3

꼬꼬무 제자를 유괴납치한 주영형 입속의혀 sbs 목요일 예능

by bullhak 2022.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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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80년 11월 13일 목요일 밤 8시
아들이 늦게 까지 들어오지 않아 걱정이었던 엄마 한 가정집에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우진이니? 너 지금 어디야?"

그런데 낯선 목소리가 대답한다.

"당신아들 내가 수원에 감금시켜놨소"
"아들 찾고 싶으면 4천만원을 가져오시오"

너무 놀라 요동치며 심장이 뛰던 찰나
바로 그 순간 또 전화가 왔다.

"왜 그러세요 이거 놓으세요"
"이사장 때문에 우린 철창신세도 졌소"
"이 정도면 감지덕지인 줄 아시오"

30,40대 남자로 추정되는데 코를 막고 얘기를 해 목소리를 알 수가 없었다.

우진이의 덩치는 또래아이들보다 컸고 중학생이었다. 형사들은 중학생이 유괴된 경우는 처음이라 했고 그렇게 우진이의 동선을 체크하기 시작한다.



우진이의 첫번째 목적지는 수랑 서점 집에서 약 500m 떨어진 이곳 누나 참고서를 대신 사주기 위해 들린 것이다.
서점을 나간 시각은 오후 4시 15분


두번째 목적지는 마포우체국 우표수집이 취미라 우체국에 자주 들린 우진이 그런데 우체국 직원들은 아무도 우진이를 보지 못했다.


약속시간 4시30분 체육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는데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실종 시간 4시 15분~30분 사이 유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주대낮에 큰대로변 유동인구도 많은 거리에 목격자가 한 명도 없었다.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았다.


납치 이틀째 드디어 전화가 걸려온다.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여성의 목소리인 것이다.
첫 번째 전화는 남자였는데 두 번째는 여자의 목소리 였다. 공범이 존재한 것이다.

범인은 위치추적을 피하기위해 30초 사이에 할 만만 하고 딱 끊어 버렸다.

납치 사흘째 이번엔 전화대신 편지가 날아왔다.
"우리는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만 이 사장 아들은 살려야 될게 아니겠소"
"우리가 안전하게 떠날 때야 댁의 아들을 풀어줄 것이오"
"다음부터 지시한대로 꼭 실행해주기 바라오"
"돈을 가방에 넣어서 20일 날 저녁 7시까지 이사장 딸이 직접 들고 종로 2가 고려당으로 가지고 나오도록 하시오"

돈을 준비해서 어른말고 우진이 누나가 약속 장소로 나오란 것이다.


약손 된그날 1980년 11월 20일 종로의 한 빵집
빵 집안 손님으로 위장한 형사들
약속시간이 다가왔는데 아무도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손님 중 한 명이 일어나 "여기 우진이 누나 있어요? 전화 좀 받아보세요"라는 것이다. 우진이 누나는 손을 벌벌 떨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금 당장 돈 가지고 남산 야외음악당으로 와"

갑자기 접선 장소를 바꾼 것이다. 여기서 다 같이 일어나 따라가면 티가 나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우진이를 부모님 못지 않게 걱정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선생님들이었다. 우진이 부모님은 납치 사실을 선생님들께만 알렸다고 한다. 우진이는 전교1등에 학생회장까지 할 정도로 성적이 매우 우수했으며 소화 마비임에도 불구하고 체육활동을 열심히 했다고 했다. 이렇게 씩씩하고 대견했던 우진이 납치소식을 들으니 선생님들의 걱정이 컸던 것이다.

부모님과 우진이의 지인을 모두 조사해 봐도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범인이 보낸 편지에서 지문이 발견된다. 지금은 컴퓨터로 대조를 하지만 당시 1980년에는 일일이 직접 대조를 해서 지문을 찾아야 했다. 아르바이트생까지 동원해서 지문을 대조하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천명, 만 명, 십만 명, 총 200만 명까지 대조를 했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수사는 다시 미궁에 빠졌다.


바로 그순간 다시 범인에게 전화가 온다. 바로 그 여자다.

"결정됐습니다. 12월 18일 서울역 시계탑 앞입니다"
"이번엔 어른이 돈 가방 갖고 나오세요"

형사들은 무슨일이 있어도 이번엔 잡기 위해 철저히 대비했다. 1980년 12월 18일 서울역 시계탑 앞 주변엔 캐럴이 울려 퍼지고 커다란 트리가 서있었다. 주변엔 형사들이 숨어있었고 시계탑 앞에서는 우진이 아버지가 범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연락을 끊어 버린다.

그렇게 한해가 지나고 1981년 3월 한 남자가 우진이의 집 앞을 찾아왔다. 바로 대통령 전두환이었다.


이 사건에 대통령이 나선 후 공개수사로 전환이 되고 수사 규모도 커져 전담 요원 322명, 동원된 경찰이 총 2만 3천여 명 단일 사건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였다. 전 국민의 관심과 집중이 쏟아졌고 우진이를 찾기 위한 캠패인이 펼쳐졌다.


그리고 신문에 어머니의 서한이 실린다.

"우진이를 데려간 아저씨 하루에도 몇 번씩 아들이 엄마~하며 대문을 들어서는 착각에 방문을 열고 뛰쳐나가 보곤 합니다. 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아들 대신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아들만 돌려주신다면 평생의 은혜로 알고 갚겠습니다. 이렇게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간절히 빕니다."

납치 6개월 경과 두수사 반장은 이 범인을 못 잡으면 경찰 그만둔다라고 결심을 한다. 그리고 납치 당일 우진이의 행적부터 다시 조사하기 시작한다. "범인은 분명히 면식범인데 우진이가 순순히 따라갈만한 사람이 누구일까?" 반장님은 체육선생을 떠올렸다. 왜 굳이 학교 밖에서 아이를 만나려고 했을까? 체육선생님은 수사초기부터 조사를 많이 했다. 그래도 다시 조사를 했는데 학교 측에선 선생님을 의심하냐며 반응이 떨떠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사들은 다시 조사를 했다.

"면담은 보통 학교에서 하지 않습니까?"
"왜 학교 밖에서 우진이를 만나려고 하셨죠?"
"제가 사실 평소에도 우진이를 많이 챙겼어요"
"성적도 좀 떨어지고 표정이 좀 어둡길래"
"격려차 맛있는 거 사주려고 했습니다."

우진이를 만나려했다가 오지 않아 대학원 수업을 들으러 갔다는 것이다. 처음 얘기했던 알리바이와 일치했다. 실제로 대학원 출석도 확인이 되었다. 그런데 새로운 증인이 나타났다. 대학원생이 그날 주선생이 오긴 왔는데 출석체크만 하고 금방 나갔다는 것이다. 알리바이에 공백이 생긴 것이다. 최소 2시간 범행을 저지르기 충분한 시간이다. 경찰은 주선생을 다시 조사했다.

체육교사 주영형

"솔직히 말하세요 그날 저녁에 뭐 하셨습니까"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하는 주 선생

"실은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날 신촌 에서 여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애가 둘이나 있는 유부남인 그가 외도를 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곧장 그 여자를 찾아갔다 신촌의 한 술집에서 일하는 홍 모씨였다. 그여자의 얘기도 주 선생과 일치했다. 그런데 나이가 너무 어려 보인 것이다.

"혹시 나이가 몇 살이에요?"
"저요? 17살이요"

놀랍게도 둘은 스승과 제자였던 사이였다. 주선생은 우진이가 다니는 남자중학교에 온지는 1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전에는 여자중학교에서 근무했었다. 그때 홍양을 만나서 연인사이가 됐다는 것이다. 형사들을 여자중학교로 급파했고 충격적인 첩보를 가져온다. 1979년 주 선생이 여중에서 근무할 때이다. 어떤 시민이 길을 걷다가 학생 책가방을 주워서 주인을 찾아주려고 가방을 열었는데 일기장이 있었고 내용을 본 시민은 충격에 휩싸였다.

"주영형 선생님께 저에게 요즘 왜이리 냉정하신가요"
"그날 선생님과 여관에서 있었던 일이 계속 생각이 나요"
"선생님 저한테 화나신 거 아니죠?"
"제가 무얼 잘못했나요?"
"선생님 정말 궁금해요"

일기장의 주인은 주선생이 맡았던 반 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일기장을 발견한 시민은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다.

"교장 선생님 나와보세요"
"대명천지에 이런일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난리를 쳤다. 학교 측에선 부랴부랴 확인에 들어갔는데 이미 학교에는 소문이 쫙 퍼져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격은 학생이 한둘이 아니란 것이다. 주선생은 아이들이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교, 교육청 모두 주선생의 손을 들어주었다. 진상조사도 없이 속전속결로 결론이 났다. "젊은 미남 교사를 연모하던 사춘기 여중생들의 치기 어린 장난이다." 민원이 들어왔기 때문에 조치가 필요했고 그렇게 주선생은 우진이가 다니는 학교로 전근을 오게 된 것이다.

경찰은 신촌 홍양을 다시 찾아갔다. 그런데 뜻밖에 이야기가 나온다 홍양의 첫마디는 "선생님은 범인이 아니에요"라는 것이다. 형사 "아니 홍양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선생님이 저랑 만났던날이 그 아이가 유괴된 날이라고 했어요"
"혹시라도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말하라고 했어요"

경찰은 주선생을 바로 소환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굉장히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바로 그때 주 선생 주머니에서 툭하고 종이가 떨어진다. 경찰이 잽싸게 뺏어서 내용을 보자

"전두환 각하, 그리고 교장선생님 경찰이 저의 족보까지 파헤치는 수사를 할 때도 달게 감수해왔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저를 의심하고 조사를 하니 너무 억울해서 저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죽은 후 가장 높은 선이 가장 잔인한 악으로 뒤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주 선생이 죽을까 가볍게 여길 수 없었던 경찰은 학교 측의 반발과 경찰 윗선의 수사 제지로 수사를 강행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경찰서로 찾아온 한 남자 국과수의 김정길 검사관이었다. 해외에서 거짓말탐지기 기술을 배워왔는데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그렇게 우진이가 납치된지 1년이 되던 어느 날 체육교사 주 선생이 거짓말탐지기 앞으로 소환되었다.


"당신은 이군을 데려간 사람을 알고있나요?"
"모릅니다"
"당신은 이군이 있는 곳을 알고 있나요?"
"모릅니다"
"이군은 죽었나요?"
"모른다니까요"

검사관은 더 강력한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날 우진이가 끼고 나갔던 장갑이다. 이 장갑을 본 사람은 딱 세명이다. 엄마, 우진이, 선생님 무작위로 9개의 장갑 사이에 섞어서 고르게 한 것이다.


"그날 우진이가 꼈던 장갑은 무엇입니까?"
"모릅니다"

말로는 "모른다"라고 답하는데 우진이가 꼈던 장갑으로 손 이가자 몸을 부르르 떨며 춥다고 하는 것이다.
분석 결과는 유괴범일 가능성 97.3%가 나왔다. 하지만 이 결과만으로 법적으로 증가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형사들은 주영형이 범이이라고 확신했다. 형사들은 주영형을 압박도 하고 사정도 했다.

"우진이 부모님을 봐서라도 당신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지금 우진이 어디 있어?"

그리고 주 선생 앞으로 홍양을 데려왔다.

"선생님 저희 만난 날 그날 아녔잖아요"

1박 2일만에 드디어 주영형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빠져나갈 데가 없네요"
"제가 우진이를 납치했습니다"

"우진이 지금 어디 있어?"

아무 대답이 없었다. 결국 우진이는 경기도 가평의 북한강변에서 발견이 되었다. 땅속에 암매장 된 채로 사건이 일어난 지 1년 하고도 17일 후 우진이 어머니가 남긴 글

"때 이르게 찾아 온 매서운 추위 때문에 수사관들도 얼었고 구경 나온 주민들도 몸을 움츠렸다. 오전 내내 허탕을 쳤다. 주영형이 가리키는 곳마다 구덩이를 파 봤으나 우진이의 시체는 나오지 않았다 구덩이를 파고 또 팠다. 오후 4시 20분 열한 번째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수사관들이 아이의 시체가 든 가방을 들고 와서 남편에게 확인시켰다. 감색 점퍼, 밤색 양말, 베이지색 내의 그 외에는 뼈만 남은 그 귀여운 아이의 형해"


수사결과 납치 당일 혹은 그 다음날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납치 당일 우진이의 목소리를 녹음해두고 그 후에 들려준 것이다. 왜 주영형은 이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노름빚 1800만원 때문이었다. 그리고 협박전화를 하고 편지를 보냈던 공범은 누구였을까? 그 여자는 17살 이 모양으로 주 선생의 제자였다. 편지에서 지문이 안 나왔던 이유도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지문이 안나온 것이었다.

주영형은 체포되고 청평이로 이송되는 차 안에서 반장님에게 "나 출소해서 88 올림픽은 볼 수 있을까요?"라고 하는 것이다. 죽음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반성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했다. 법정에서는 자신이 죽인게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살인죄가 아니라 유기치사죄를 적용받기 위함이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전과도 없고 교사 생활도 열심히 해 왔습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디 저를 선처해 주십시오"

재판의 결과는 사형이 선고되고 8개월 뒤 사형이 집행되었다. 공범이었던 이양도 처벌을 받았다.
단기3년, 장기 5년 형 당시 이양의 처벌을 찬반 하는 논란이 많았는데 그래서 나온 대책은 순결교육이었다.


출연진 : 장성규, 장도연, 장현성
게스트 : 한승연, 에일리, 정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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