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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꼬꼬무 시즌3

꼬꼬무 1954년 해방직후 첫 한일전 도쿄대첩 스위스월드컵 sbs 목요일 예능

by bullhak 2022.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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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끌고 6개월이 지난 1954년 영등포 한 남자가 길을 걷고 있었다. 이 남자는 29세 홍덕영 씨였다.
한참 길을 걷다가 멈춰 선 그는 "아~ 이거 또 시작이네" 망치를 꺼내 들며 신발을 막 내려치기 시작했다. 신발 굽이 빠졌던 것이다. 허름한 여관에 도착했고 하나둘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총 20명의 특무부대 군인이었다. 이들은 방첩대로 간첩을 잡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시각 경무대에서는 이승만의 호통소리가 복도까지 울리기 시작한다.
"아니 글쎄 안된다니까 내가 몇 번을 얘기하지 않았나!"
"각하!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주십시오! 삼천만 동포의 명운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대통령 앞에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는 이 사람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 이원이었다. 결국 대통령은 한발 물러섰고 승인을 하게 된다.
장택상 의원은 여관에 있는 군인들을 불러 모았다.
"드디어 오늘 각하께서 출격을 허락하셨다."
"단 졌을 때는 여기 있는 우리 모두"
"현해탄에 몸을 던져야 할 것이다."
"각오는 되있나"
"예! 목숨을 걸겠습니다."


당시 장택상의원은 대한축구협회 의원이었다. 일본에서 열리는 한일전에 출격 승인을 요청한 것이었다. 경기 개최를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놈들이 우리 땅을 밟는걸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한일전은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으로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이었다. 해방된 지 10년도 안됐는데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에 온다? 만약에 지기라도 하면 국민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온 해법이 일본에서 두경 기를 모두 치르는 것이었다. 피파와 일본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최초의 한일전이 벌어지게 된다.


한국 선수들의 구성은 모두 군인이었다. 당시 축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군 입대 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들이 사용했던 축구화 뽕은 못을 박아서 고정시켰다. 걷다 보면 못이 삐져나와 찔려서 피가 나기 부지기수였고 이때 선수들은 항상 망치를 소지해서 삐져나온 못을 집어넣었던 것이다.


일본에 갈 돈이 없던 시절 재일동포들은 모금운동을 해서 후원금을 지원해 주었다. 숙소에서 이런 저런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덕영 씨 누군가 여관방 문을 두드려 문을 열어보니 어느 할아버지가 달걀 한 꾸러미를 주는 것이다. 당시
달걀 한꾸러미는 소고기 한 근의 가어 치였다. "별건 아니지만 선수들한테 꼭 대접해주세요" "이걸 먹고 꼭 이겨주세요"라며 추운 겨울 총 다섯 꾸러미를 가져온 것이었다. 해방은 됐지만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때의 기억 일본을 이겨 한을 꼭 풀어 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운명 적이게도 일본으로 출국하는 날 3.1일이다. 선수들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비장했다.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출국을 하는데 사람들이 구름 때 같이 몰려든 것이었다.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 만세 만세" 를 외쳤다. 도쿄에 도착해서는 재일동포들이 선수들을 환하게 맞아주었다.


첫 경기 일주일전 일본 선수들은 운동장에서 막바지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국 선수들은 농구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며칠 동안 내린 눈 비로 날씨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축구화가 하나뿐이라 눈비에 젖으면 신을 수가 없어 실내에서 훈련을 한 것이다.1954년 3월 7일 대망의 한일전 첫 번째 경기가 치러지는 날이었다. 눈이 내려 경기장 컨디션이 최악이었던 것이다. 한국은 경기가 미뤄질 수도 있어서 안도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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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심판은 일본과 합의해 경기를 진행할 것인지 결정하라라고 했고 일본은 경기를 미룰 생각이 없었는 지 눈 덮인 경기장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는 것이다. 눈을 녹이기 위함이었다. 오후 2시 경기장에 선수들이 들어서고 사상 최초로 일본 도쿄 한복판에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경기장 눈은 다 녹았지만 녹은 눈으로 인해 땅은 진흙 투성이었다. 말 그대로 진흙탕 싸움 이었다. 축구화는 젖었고 공은 물을 먹어서 동 덩이 같았다.


악조건 속에서 펼쳐진 첫 한일전 바로 그때 전반 15분 일본의 선제골이 터졌다. 이 골로 인해 우리 선수들 눈에는 독기가 보였고 그때 부터 선수들의 움직임이 완전히 달라져 경기 주도 건을 잡은 것이다. 그리고 불과 6분 만에 동점 골이 터진다. 그런데 관중석에는 수백명의 동포들이 있었지만 환호성 없이 조용했다. 일본에 계속 살아야 하니 눈치가 보여 환호성을 지를 수 없었던 것이다.

1954년 tv가 없었던 시절 라디오로 중계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2시간이 지난 뒤에야 골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최종 스코어는 5대 1 대한민국의 완승이었다. 경기 내내 눈치가 보여 조용했던 재일동포들은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나가는 선수들에게 울며 이야기했다.
"일본에 산 이래 이런 행복은 처음이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아들이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녔거든요" "이제 당당하게 어깨 펴고 학교 가겠네요"
해방 후 9년 쉽지 않은 세월을 보냈을 재일동포들 경기가 끝난 후에야 옅은 미소를 보였다.


일주일 후 월드컵으로 가는 마지막 2차전이 열리고 2:2 무승부로 일본을 물리치고 월드컵 티켓을 따내게 된다. 금의환향한 선수들은 엄청난 환대를 받았고 바로 대통령을 만났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공식 포스터가 발표되었는데 16개국 중 태극기가 보이지 않았다. 태극기가 있을 위치에 공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약소국이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은 것이다.


그때 당시 스위스로 가는 직항이 없어서 도쿄공항으로 향했다. 22장을 사야 하는데 표는 13장밖에 없었다. 경기까지는 d-8일 선발대 13명이 먼저 출발을 했다. 일본에서 태국으로 간뒤 인도에서 로마에서 스위스로 향해야 한다. 예약을 한 상태가 아니라 바로바로 환승을 해야 했다.
운이 좋으면 민항기를 탔고 없으면 사정사정해서 군용기를 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위스로 향했다.
1진 13명이 스위스에 도착한건 첫 경기 3일 전이었다. 무려 5박 6일이 걸렸다. 비행시간만 64시간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우리나라의 첫 상대는 우승후보 0순위 헝가리 였다. 최근 4년간 31경기에서 무패행진을 이어나가고 있던 팀이다. 어떤 팀을 만나도 10분 만에 골을 넣는 마의 10분의 법칙이 있었다. 최고의 스트라이커 악마의 왼발 페렌츠 푸스카스가 있는 국가였다.
경기 당일 2진으로 출발한 대표팀도 도착했고 헝가리의 경기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경기가 시작되고 예상과는 다른 분위기가 펼쳐졌다. 헝가리 선수들이 긴장한 것이다. 한국 선수들은 시작하자마자 전원이 수비했고 마의 10분을 넘겼다.


그리고 감독의 지시가 떨어진다.
"다 져도 좋다 한 골만 넣자"
"그래야 우리 국민들 속이 좀 시원하지 않겠니"
하지만 전반 12분 푸스카스의 첫 골이 터졌고 9대 0으로 패배하고 만다. 역대 월드컵 최다 골 차이의 경기였다.
고개를 떨군채 선수들은 경기장을 빠져나오는데 사람들이 덕영 씨를 딱 막고는 덕영 씨의 배와 가슴을 더듬으며 대단했다며 감탄을 하는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니 초콜렛, 빵, 시계로 가득했다. 헝가리 아나운서는 중계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한국 대표팀은 전쟁이 끝난 지 1년도 채 안 된 나라의 선수들입니다."
"그들은 엄청난 투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헝가리 감독이 전한 말 "한국 팀은 쓰러져도 계속 다시 일어났습니다. 마치 지치지 않는 사자들이 뛰는 것 같았습니다."
3일 뒤 2번째 경기 터키전에 열린다. 1진 선수들은 너무 지쳐 출전할 수 없었고 2진 선수들이 출전한다. 이날 경기는 관중 수도 없었을뿐더러 무관심 속에서 경기가 진행되었다.

경기 결과는 7대 0 경기 결과만 놓고 본다면 비난을 받을 만한 성적이었지만 속사정을 알고보면 너무나 대단한 성과였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된국가가 예선을 뚫고 본선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일이었다.
그날 이후 다시 월드컵 무대를 밟기까지 무려 32년이 걸렸고 9회 연속 월드컵 진출을 하게 된다. 9회 연속 월드컵에 진출한 나라는 전 세계 6개 국가밖에 없는 대기록이다 거기에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하고 4강신화를 만들어 낸다.

출연진 : 장성규, 장도연, 장현성
게스트 : 이현이, 제갈성렬, 안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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