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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꼬꼬무 시즌3

꼬꼬무 최초의 여성서양화가 세기의 이혼스캔들 나혜석 정리 sbs 목요일 예능

by bullhak 2022.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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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20 년 4월 10일 경성 101년 전 이름 아침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한 남학생이 신문을 배달한다.
한 노인이 신문 하나를 구입해서 보고는 쯧쯧 고개를 저으며 기가막혀하는데 신문의 내요은 한 남성과 여성이 공개 결혼을한다는 광고를 낸 것이다.


남편은 35살의 엘리트 변호사 신부는 최초의 서양화가였다. 신랑은 돌싱이었고 사별한 부인과 애까지 있었다.
당시 귀했던 파인애플을 사서 보내고 매일같이 편지를 써서 보내는 등 5년간의 구애 끝에 결혼을 하게된다.
100년 전 지금과 같은 서양식의 혼례로 당시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신부는 자신과 결혼하기 위한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일생동안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줄 것
첩을 두는 것이 합법이었던 시절인 1900년대 초 호적조사 결과 경성의 남성 5.6%가 첩을 두었고, 관직에 있는 사람은 20%가 첩을 두었다. 5명 중의 1명 꼴이었다. 첩을 두는 것이 재력의 상징이었다. 신부의 아버지는 첩이 많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신부보다 1살 많은 첩이 있을 정도였다. 첩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어머리를 보고 자랐던 신부는 결혼 전 첫 번째 조건으로 자신만을 사랑해달란 요구를 한 것이다.


두 번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
일과 가정의 양립, 살림만 하는 게 아니라 내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세 번째 시어머니와 따로 살겠다.
대부분이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시절인 1920대에 시어머니와 따로 살겠다는 건 당시 파격적인 결혼 조건이었다.

네 번째 신혼여행을 떠나자
신혼여행 장소는 신부 자신이 정하겠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당일까지 신랑에게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고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도 모른 채 아내의 뒤만 따라간 남편 곧이어 부인의 걸음이 멈춘다. 신랑은 주변을 살펴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무덤이었다. 바로 이곳은 신부의 첫사랑의 무덤이었다.
"이곳에서 과거는 모두 묻고 당신과 새롭게 출발하고 싶어요"
"그래요 근데 무덤이 너무 초라하구려 내가 비석을 세워주겠소"
자신이 과거가 있는 여자라는걸 스스럼없이 털어놓은 여자 당시에 여자의 과거는 소박맞고 쫓겨날 일이었다.
이 여자는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이다.


당대 최고의 엄친딸로 불린 그녀, 일거수 일투족이 신문에 실릴 정도로 셀럽중에 셀럽이었다. 신혼여행도 다녀오고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며 그림도 마음껐그렸다. 그녀가 원했던 결혼생활을 보내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변수가 생겼다. 임신을 한 것이다. 아이로 인해 일에 제약이 생길 것 같은 두려움 있었던 그녀는 고심 끝에 일본으로 떠나기로 결정한다. 출산 전까지 그림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것이다. 남편은 부인의 뜻이 그렇다면 다녀오시오 라며 그녀의 결정을 받아들여 줬다. 그렇게 혼자 일본으로 떠난 그녀는 6개월간 그림에 전념했고 만삭의 몸으로 귀국하고 첫 전시회를 연다.


여자 서양화가로는 국내 최초 전시회였다. 전시회 첫날 천여 명의 사람들이 방문했고 다음날에는 4~5천여 명의 사람이 방문했을 정도로 초 대박이 터진 것이다. 제일 비싸게 팔린 그림이 350원 이었다. 당시 조선인 순사의 월급이 29원이었는데 350원이면 일 년 연봉의 값이었다. 그녀는 단번에 재능있는 화가로 인정을 받았다 그 후 그녀는 아기를 맞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아기의 작명을 시작했다. 작명한 이름은 김나열 남편의 성고 자신의 성 기쁠 열 의 뜻을 가진 이름이다.


혜석은 원래 이름이 없었고 아기로 불렸다 이름이 나아기였다. 혜석이란 이름은 고등학교 올라가서 개명을 한 것이다.
왜 이렇게 이름을 성의 없게 지었을까? 00딸, 00부인, 00 엄마라고 불리는 데 무슨 이름이 필요하냐라는 인식의 문화였다. 심지어 동생의 이름은 간난이었다. 잘 사는 재력가의 집에서 이렇게 대충 이름을 지었으니 일반 가정집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그 시절 여자 이름 중에는 언년이란 이름도 있었다. 언 = 어긋나다

시간이 흘러 출산일이 다가왔다. 혜석은 10간의 진통 끝에 출산을 하고는 너무 서럽고 원통해 펑펑 울었다.
그녀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심경을 잡지에 실는다.
박박 뼈를 긁는 듯
쫙쫙 살을 찟는 듯
바짝바짝 힘줄을 옥죄는 듯
쪽쪽 핏줄을 뽑아내는 듯
살금살금 살점을 저미는 듯
오장이 뒤집혀 쏟아지는 듯
도끼로 머리를 부수는 듯
이렇게 아프다나 할까나 아니다 이도 또한 아니다.


육아에 대해서 쓴 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수개월간 계속되더니 몸은 마치 도깨비 같아서 해골만 남았다. 그런 것을 탈취해가는 자식이 생겼다 하면 이에 더한 원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자럼으로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때어가는 악마라 생각했다. 모친의 사랑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못된 자 마음속에 구비되어 있는 것 같이 말하나 나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 즉 경험과 시간을 경해야 하는 듯 싶다. 이 글이 발표되고 신성한 출산을 경망스럽게 했다고 난리가 난다. 자식을 '악마'라 표현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나혜석은 한동안 잠잠했었는데 이유는 일본 외무성에 고위 관리직으로 들어가 중국으로 가게 된 남편을 따라가 경성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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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만주에 있는 일본 외교관 관사에 어느 남자가 큰 가방을 들고 오더니 나혜석을 찾는다. "제가 상해에 가는 길인데 동행을 해주실수 있을까요?" 혜석은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한 뒤 옷을 갈아입고는 곧장 남성과 길을 나섰다. 그 남자는 독립운동가였다. 혜석이 거주했던 안동현은 중국을 오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곳이었다. 일본 경찰들로 경비가 삼엄했던 국경지대였다. 독립운동가들이 통행에 어려움을 겪을때 혜석이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 남편이 일본 외교관이라 신분증을 내밀면 무사통과였다. 총과 무기도 쉽게 옮길 수 있었다. 심지어 쫓기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도 제공했다. 혜석은 3.1운동에도 참석했고 그로 인해 5개월간 옥살이를 하는 등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만주에 있는 동안 혜석은 3명의 아이를 낳고 틈틈히 독립운동을 돕고 그림도 그렸다. 그녀가 경성에 다시 나타난 건 1929년 7년 만이었다. 혜석이 귀국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잡지사와 인터뷰였다. 그런데 이 인터뷰에서 폭탄발언을 한다.

잡지 '삼천리'

최근 유럽에서는 시험 결혼이라는 것이 제창되고 있는 줄 압니다. 시험이니까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편이나 절대적인 의무를 지지 않죠 쉽게 말하면 이혼한다 셈 치더라도 위자료니 정조 유린이니 하는 문제가 붙지 않겠죠 그러니 시험 결혼은 잦은 이혼을 막는 길도 되고 남성과 여성의 헤어짐과 만남을 훨씬 자연스럽게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겠습니다.
1930년 혼전동거를 주장한 나혜석의 인터뷰 글을 본 사람들은 기가 막혔다. 이 시절은 혼전순결을 목숨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이 후로 나혜석은 이단아가 되어 버린다.



이 인터뷰를 하기전 나혜석은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세계일주를 했었다. 1927년 한반도 내륙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 을 1년 9개월 동안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세계여행으로 나혜석의 인생은 180도 달라지게 된다.

세계일주 후 1년 뒤 남편이 씩씩 거리며 들어왔다. 대꾸도 없이 방으로 간 남편은 장롱을 열더니 땅문서 집문서 등 고가의 문서를 다 끄집어내고 온 가족을 다 불러 모았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던 혜석은 남편에게 무슨 일이냐며 묻자 남편은 혜석을 째려보며 "우리 이혼합시다. 서방질하는 년과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어" 라며 이혼을 하자는 것이다. 세계일주 중 프랑스 파리에서 남편과 잠시 떨어져 있던 사이에 딴 남자를 만난 것이다. 그 남자의 이름은 최린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했다가 나중에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이다.


이남자가 여행차 파리에 갔다가 혜석을 만난 것이다. 낯선 땅에서 같은 한국인을 만난 둘은 여러 이야기를 했고 급속도로 친해진다. 그리고 유학생들 사이에서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댁이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가 나중에 남편의 귓속에 까지 들어가게 된 것이다.

혜석은 이혼을 반대했지만 남폄은 요지부동이었고 끝까지 반대하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에게도 여자가 있었다. 혜석은 불공정함을 호소했지만 첩이 합법이었던 시절이기에 남편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결혼 11년 만에 빈털터리로 쫓겨나게 된다. 아이들의 양육권도 빼앗겼다. 그 후 그녀는 미술학원을 열었다. 오픈 후 생원들이 많이 몰렸지만 몇 일 후 갑자기 학생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혼녀는 화냥년이라며 배척한 것이다.


화냥녀=환향녀로 고향에 돌아온 여자를 뜻하는 말이다. 조선시대 임금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삼전도 굴욕을 당한 병자호란 때 20만 명의 여자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고 그 20만명의 여성중 일부가 목숨을 걸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 품에 안겼던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고 왜 살아 돌아온 것이냐 핍박을 주었고 이 후 환향녀를 정조를 잃은 여자란 뜻으로 불리게 되었다. 비속어로 화냥년이 된 것이다.

외도남인 최린은 장관급으로 승진하고 잘 나가자 혜석은 화가 치밀어 최린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다 죄명은 정조 유린 죄이다. 며칠 뒤 이 사건은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나고 경성은 난리가 난다.


이때 심경을 적은 나혜석의 글

조선 남성의 생각은 이상합니다.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아내에게나 일반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자기는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종종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여성이 나타나면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뒤에서는 말살시키고 험담 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게 무슨 어이없고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입니까

소송을 당한 최린은 아무일도 당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나혜석만을 비난했다. 심지어 친오빠까지도 등을 돌린다.

나혜석은 또 다시 글을 발표한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오직 취미입니다.

정조는 개인의 취향이고 각자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비난의 화살을 맞으면서도 끊임없이 주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1917년 일본 유학 시절 발표한 글

조선 여자들도 사람이 될 욕심을 가져야겠소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우리 자손들을 무엇을 주어 살게 하자는 말이오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 잔 말이오 다행히 우리 조선 여자 중에 누구라도 가치 있는 욕을 먹는 자가 있다 하면 우리는 안심이오

그녀는 후대의 여성을 위해서 변화의 시작이 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의 화실에 화재가 덮친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자신이 아끼던 그림들이 타버리고 10여 점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로 악재가 계속되었다. 파킨슨 병에 걸려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고 큰아들의 사망 소식을 접한다.


남아있던 그림들을 모두 팔고 여비를 모아 아이들을 만나려 했지만 시댁의 반대로 아이들을 만나 볼 수 없었다.
10년뒤 중학생이 된 둘째 아들을 만나러 갔는데 둘째 아들은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다. 악화된 병세로 거동 까지 불편해진 그녀는 양로원에서 지내다가 1949년 1월 31일 행방불명이 되고 그 후 행려병자의 무료병동에서 사망기록만이 발견되었다.

출연진 : 장성규, 장도연, 장현성
게스트 : 이미도, 이현이, 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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