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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꼬꼬무 시즌3

꼬꼬무 독립운동가 김상옥 동대문 홍길동 1vs1000의 사나이 sbs 목요일 예능

by bullhak 2022.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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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월 12일 경성의 종로거리 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갑자기 폭발음이 나며 땅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종로경찰서에서 폭탄이 터진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종로경찰서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경성의 4개의 경찰서 중 종로경찰서는 독립항쟁을 억압하는 총본부였다. 고문전문가가 있었으며 물고문, 전기고문, 어린 여학생에게 성고문, 손톱뽑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한 곳이었다. 한번 끌려 들어가면 산송장이 되어 나온다는 곳 그런데 종로경찰서 폭파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지않았다. 일본의 입장에서 너무 수치스러워 보도를 하지 않은것이다.

이틀이 지난 뒤에 신문에 보도가 났다.
"지나가던 조선인만 다쳤다. 일본인은 피해가 없다"


경성시내 모든 경찰서에 비상 명령이 내려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경찰들이 의심하던 '불령선인'이란 사람을 용의자로 특정한다. 일본 경찰들에게는 후테이센진으로 불리는 불량선인은 일본에 반항하는 조선인 즉 독립운동가이다.
일본경찰은 대대적인 검문검색을 실시한다. "마치 계엄령이 내린 듯 거리거리 골목골목에 수색대가 줄매 듯하고 밤 8시가 되면 종로통에는 인적이 절대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수상한 자이면 하루 저녁 네 다섯 차례 몸수색을 당했습니다."
잡지'개벽'의 내용으로 당시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이정도의 억압은 3.1 운동 이후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일본은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미와와사부로를 대장으로 임명한다.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청산리 전투 김좌진, 도마 안중근, 만해 한용운, 시인 윤동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추적 및 고문하였던 인물이다.

마구잡이식 수사방법이 아니라 사냥개(밀정)를 풀어 수사를 하였다.
"일본군 백명보다 밀정이 더 무섭다"라는 말이 성행했다.

비밀리에 활동해서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이름이 확인된 밀정만 895명이다.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라 한다.
같은 조선인이라 정보수집이 유리하고 민족 분열도 일으킬 수 있어 일본에게는 일석이조인 셈이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로 전화하면서 늘어난 자금으로 밀정을 키우는데 자금을 이용한다.

종로경찰서 폭파사건 이후 미와와사부로는 밀정들을 소집한다. 밀정들이 수집해온 첩보 중 김상옥의 어머니가 3년 전 사라졌던 아들을 만나고 온 것 같다는 첩보로 경찰서는 발칵 뒤집힌다. 김상옥은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 암살시도 했던 인물이다.


일본 경찰들은 눈에 불을 켜고 김상옥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 김상옥의 별명은 동대문 홍길동으로 신취귀몰이라 소문이 난 사람이다. 사격 솜씨 또한 뛰어났다. 쌍권총으로 원샷 원킬 영화 <암살>에 하정우가 연기한 하와이안피스톨, <밀정>에 박희순이 맡은 배역이 모두 김상옥을 모델로 한 것이다.

원래 김상옥은 동대문에서 잘나가는 청년 사업가였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대장간에서 일했던 김상옥은 그러다 23살에 대장간을 차리고 말편자를 만들어 대박을 터트린다. 몇 년뒤 그는 말총 모자로 더 큰 대박을 터트린다.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의 단발령으로 강제로 머리를 자르게된 조선인

신체발부 수지부모 - 몸과 피부 머리카락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으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

머리를 잘린 조선인은 수치심을 감추기위해 말총 모자를 썼다고 한다. 어느정도 사업이 성공했냐면 전국에 체인점을 열고 50여 명의 직원, 2층의 건물주, 대기업에 준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있던날 김상옥도 직원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동참했는데 그곳에서 일본 순사가 어린 여학생에게 장검을 휘두르는 현장을 목격한다. 일제는 장검을 휘두르며 만세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팔 다리를 자르고 찔렀다. 이 날을 기점 으로 김상옥은 완전히 달라진다 낮에는 사업가 밤에는 해외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는 비밀 신문 혁신 공보를 만들기 시작한다.


김상옥의 학력은 초등학교2학년 졸업이었다. 부족한 학력에도 불구하고 대학 졸업을 마친 엘리트 동지들을 뛰어난 리더십으로 리드하고 자금지원까지 했다. 얼마 안 가 밀정에 의해서 종로경찰서로 붙잡혀가게 되고 40일 동안 고문을 당하게 된다. 고문을 받는 동안 조직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게 된다. 온몸이 피고름이 될 정도로 고문을 당한 그는 평화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만주에 있는 무장독립단체와 접선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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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 원의 독립자금을 지원하고 무기를 지원받기로 한다. 당시 조선인 경관의 월급이 28원, 172개월치의 월급이다 한 푼도 안 쓰고 14년을 저금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이다. 김상옥은 조선 총독을 죽이기 위한 암살단을 조직하고 대장간 지하실에 훈련소를 만들었다.


어느날 미 의원이 조선을 시찰 나오는데 조선 총독이 마중을 나간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일제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경성 곳곳에 기마경찰을 배치했고 서울역~조선호텔까지 모든 조선인들의 통행을 금지시킨다.그리고 특별조치로 위험인물을 미리 잡아 가두는 예비검속을 실시한다. 거사 하루 전 날 일제는 불량 선인 1000명을 잡아들이기 시작한다. 그 명단에는 김상옥의 이름도 있었다. 일제는 김상옥을 집을 덮쳤으나 그는 홍길동처럼 도망쳤다. 사라진 그의 집을 수색하던 중 벽에 걸린 액자 뒤에서 암살 계획서와 권총을 발견한다. 비상이 걸린 일본경찰은 김상옥의 가족과 지인을 모두 잡아들여 고문을 한다. 그중에 장규동이란 여성 동지가 가장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일제는 피고없는 제판을 실시하고 김상옥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다.

이제 잡히면 죽는 신세가 된 김상옥은 상해로 떠나고 백범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나 다시 거사를 치를 준비를 한다.군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경성으로 다시 돌아온 김상옥은 가족들과 지인들을 만나고 자신의 집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방안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한여인이 누워있었는데 그 여인은 여성 동지 장규동이었다. 그녀는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다 망가진 상태였다. 이 모습을 본 김상옥은 자신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죄책감을 느꼈는데 그때 장규동이 소원이 하나 있다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을 같이 하고 싶다며 자신을 상해로 데려다 달라는 것이다. 김상옥은 그녀를 데리고 상해로 갔지만 결국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김구 선생은 김상옥을 불러 장례를 치루라며 100원을 건넨다. 장례를 끝마치고 온 김상옥은 들고온 상자 안에서 권총을 꺼내며 이 권총으로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한다. 상해를 떠나기전 그는 뒷짐을 지고 사진을 찍었는데 이유를 물으니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이 손이 부끄러워서
내놓지 못하겠다"


김상옥과 일행은 비단 장수로 변장해 폭탄이 담긴 짐을 메고 보름 만에 경성에 도착한다. 거사는 앞으로 한 달 후 총독이 일본 가는 열차에 타는 날 남대문역에서 폭탄을 터트리는 계획이다. 현장 답사와 동선체크 모두 마치고 상해에서 대형 폭탄이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이다. 연락도 할 수 없는 상황에 거사 날은 다가오고 결국에는 소형 폭탄을 쓰기로 결심한다. 소형 폭탄이 사제여서 불발탄이 많아 테스트를 진행하기로 결정하는데 테스트 결정지가 바로 종로 경찰서이다. 왜 조용한 곳이 아닌 종로경찰서를 택했냐면 동쪽에서 소리를 내서 서쪽을 친다. '성동격서' 전략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거사를 닷새 앞두고 종로 경찰서에서 폭탄을 터트린다.

이 사건 이후 빠르게 수사망이 좁혀왔고 김상옥의 신원과 은신처가 들키게 된다.
은신처인 후암동에 있는 여동생의 집 새벽 5시에 일본 순사들이 들이닥쳤다. 순사들이 방문을 열자 쌍권총을 든 김상옥이 총을 쐈고 순식간에 일본 형사 3명을 처치하고 달아난다.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일본은 경성에 있는 경찰을 총동원해 남산을 포위했고 여동생 부부를 경찰서로 연행한다. 그 시각 김상옥은 남산 덤불 사이에 숨어있었다. 칼바람이 부는 1월 버선발로 도망 나와 동상이 걸려 발에서는 피가 흘렀다. 종로경찰서 폭파사건 7일후 경성 시내 효제동 주택가에 위치한 동지의 집에 큰 궤짝을 맨 우체부 한 명이 나타났는데 바로 김상옥이었다. 포위망을 뚫고 다시 돌아 온 것이다. 그가 매고 있던 큰 궤짝 안에는 총과 총알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밀정이 보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일본 경찰은 밤에 1000여 명을 동원해 주택가를 포위한다.

일본 경찰들은 죽음이 두려워 김상옥이 있는 방 문을 아무도 열지 못했다. 그래서 집주인을 끌고 와 문을 열라며 폭행했고 이 집의 12살 막내딸을 데려와 문을 열게한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미닫이 문이 하나 있었다. 일본 형사가 미닫이 문을 열자 총소리와 함께 형사가 쓰러졌고 밖에 있던 경찰들이 총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다시 방안을 확인하는데 아무도 없었다. 벽에 구멍이 뚫려있었는데 그곳으로 김상옥이 달아난 것이다. 경찰들은 지붕으로 도망갔다며 지붕위를 수색한다. 그때 또 총성과 함께 순사가 쓰러진다. 변소 쪽에서 난 소리였다. 일본 경찰은 변소 쪽으로 모여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잠시 조용해진뒤 갑자기 들려오는 한 발의 총성 문틈 사이로 두 눈을 두릅 뜨고 일본 경찰들을 노려 보고 있었다 총격을 당할까 봐 경찰들은 다가가지 못했다. 그들은 김상옥의 어머니를 총알받이로 데려와 문을 열고 들어가게 했다. 동상에 걸려 잘려나간 발가락과 두눈은 부릅뜨고 두 손엔 권총을 꼭지고 죽어있는 아들의 모습을 본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만다.

김상옥 의사가 상해를 떠나기전 동지들에게 했던 말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나 봅시다. 자결해서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 않겠소"

그의 남아있는 가족들은 일제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힘겨운 삶은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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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사가 순국한 장소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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