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Iot)넷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 자율주행차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이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 있죠 바로 엔비디아입니다. 올해만 주가가 230%가량 폭등하며 장안의 화제가 되었는데요 게임 그래픽 카드로 시작해서 창업 30년 만에 1조 클럽을 달성하며 미국 반도체 1위 기업이 된 엔비디아 엔비디아도 자세히 들여다보니 분량이 제법 있어서 3편에 걸쳐 풀어보겠습니다.
1편을 시작하겠습니다.
1.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다.
1963년 2월 17일 대만 타이난시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젠슨 황, 훗날 엔비디아를 일으킨 창업주 중 한 사람이 되죠 젠슨의 아버지는 화학자였고 어머니는 영어 교사였는데요 부모님이 학구적인 덕분인지 젠슨은 어린 시절부터 과학과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집 거실에 늘 수학이나 과학과 관련된 잡지와 서적이 있어서 자연스레 과학과 기술에 호기심을 가질 수 있었던 건데요 그러던 어느날 젠슨의 아버지는 우연히 직원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가 미국의 선진적인 문화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때 불현듯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자신의 아들도 미국에서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며 막연하게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다고 합니다. 한편 영어 교사였던 어머니도 교육열이 대단했는데요 초등학교에 가기도 전에 매일같이 영어 사전에서 무작위로 10개의 단어를 골라 어린 두 아들에게 외우도록 했을 정도였거든요 그러던 1973년 젠슨은 10살이 채 되지 않은 이른 나이에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부모님의 염원대로 정말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 것이죠 사실 젠슨의 가족은 태국으로 거처를 옮겨 살고 있었는데요 1973년 태국에서 군부가 민주화 운동에 나선 대학생에게 발포를 하며 정치적 소요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위협적인 분위기를 피해 젠슨과 젠슨의 형은 삼촌이 있는 미국으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으로 이민을 온 젠슨의 아메리칸 드림은 생각보다 순탄치 못했습니다. 심한 인종차별은 물론 매일 같이 변기 청소를 도맡아 하는 등 불행한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민 초기 젠슨은 문제아 같은 품행을 보이기도 했죠 다행히 젠슨은 성장하는 가운데 자신의 처지를 바꿀 것은 오직 공부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학업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 결과 오리건 주립대 전기공학 학사를 거처 스탠포드대학원 박사 과정까지 밟는 엘리트 인재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던 젠슨은 졸업 후인 1984년 Advanced Micro Devices Inc.
우리가 흔히 AMD로 알고 있는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이곳에서 1년 가량 마이크로프로세서 설계자로 지내면서 본격적인
엔지니어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요 1985년에는 네트워크 속도를 높이는 반도체 설계 및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회사인 LSI Logic으로 이직하게 되죠 이곳에서 그는 다양한 영역에서 일을 배우게 됩니다. 엔지니어링 부터뿐 아니라 마케팅 부서, 일반 관리팀에서도 커리어를 쌓으며 그 능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승진도 할 수 있었죠 그러던 어느날 젠슨은 문득 컴퓨터의 미래를 좌지우지 할 것은 그래픽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 개인용 컴퓨터가 발달 하는 가운데 컴퓨터 게임이나 다양한 멀티미디어 역시 함께 성장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죠
2.pc 그래픽 산업의 태동
젠슨이 그래픽에 주목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 컴퓨터 산업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초기 컴퓨터 산업은 중앙처리장치 CPU와 주기억장치인 RAM 그리고 하드디스크드라이브와 같은 보조기억장치의 성능 위주로 발전해 왔습니다. 이것들이 데이터를 연산하고 저장하는 컴퓨터의 기본 기능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생성된 데이터 출력 장치를 통해 사용자가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되는 것이 컴퓨터의 기본 작동 원리입니다.
초기의 컴퓨터는 지금과 같은 모니터가 없었기 때문에 천공카드와 같이 아주 단순한 방식의 출력 장치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용자가 데이터의 출력 결과를 쉽게 알아볼 수 없었고 판독 시간도 오래 걸려 일반인이 사용하기 힘들었는데요 누구나 쉽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컴퓨터 기술이 점차 발전하면서 사용자가 더 쉽고 빠르게 데이터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화면(모니터) 형식의 출력장치가 등장하게 되죠 그런데 CPU, 램, 하드디스크드라이브 등은 자체적으로 화면을 출력할 수 있는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이 생성한 데이터를 영상 신호로 바꿔서 모니터로 전달해 주는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이 기능을 해주는 장치가 등장하게 되니 바로 그래픽 하드웨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그래픽 카드가 탄생하기까지는 꽤 많은 변천사를 거치게 됩니다. 그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우선 그래픽이란 개념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은 1976년 애플이 처음으로 출시한 개인용 컴퓨터 애플1때 부터였습니다. 애플1에 탑재된 비디오 컨트롤러가 24열 x 40행의 대문자 텍스트를 표시한 것인데요 애플은 1년 후 애플의 역작 애플2를 출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색상을 표시할 수 있는 컬러 그래픽 모드를 내장시켰습니다.
애플2는 다른 컴퓨터 회사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데 그래픽 하드웨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수히 쏟아져 나오던 컴퓨터들에는 다들 하나같이 새로운 그래픽 하드웨어가 포함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중 아타리 8비트 제품군들은 컴퓨터 게임 덕분에 큰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픽 시장의 혁명을 일으킨 곳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IBM이었죠 1981년 IBM은 5150을 출시하게 됩니다 이 pc의 표준 비디오 인터페이스로는 MDA를 사용했는데요 MDA는 80열 x 25행의 텍스트 해상도를 지원하는 단색 전용 카드였으며 주로 텍스트를 표시하는데 사용되는 장치였습니다. 또 CGA라는 컬러 그래픽 어댑터도 함깨 도입되었습니다.
CGA는 4가지 색상의 320x200또는 2가지 색상의 640x200을 포함하여 몇 가지 다른 모드를 표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로도 IBM은 그래픽 하드웨어 개발에 진심을 보이며 1987년 640x350해상도에서 16색을 자랑하는 EGA를 출시했습니다. 1988년에는 640x480해상도에서 256색을 표시하는 기능으로 사실상 PC그래픽 하드웨어의 새로운 표준이라 불리는
VGA를 출시하면서 PC그래픽 시장의 혁명 시대를 열었습니다 1990년대는 더군다나 PC게임과 전문 시각화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게 증가하면서 PC업계에서는 너도나도 그래픽 하드웨어 시장에 열띤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던 1992년 그래픽 장치 인터페이스가 포함된 window3.1이 등장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그래픽은 더이상 옵션이 아닌 주류 컴퓨터 응용 프로그램에 필수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1985년 부터 1993년 까지 LSI LOGIC에서 일하며 빠르게 변하는 컴퓨터 그래픽 시장을 읽은 젠슨은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3.엔비디아 창업
1993년 초 젠슨은 평소 가깝게 지내던 친구이자 동료인 크리스 말라초스키와 커티스 프리엠을 불러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 최근 PC시장을 흔들고 있는 변화에 대한 대화를 하게 됩니다. 세 사람은 평소에도 상상하기를 좋아해 모이게 되면 브레인스토밍을 자주 했었는데요 이날 젠슨은 이 말로 운을 뗐습니다. "앞으로는 그래픽과 비주얼 컴퓨팅의 시대가 열릴 것 같아" 두 친구 역시 PC업계에 몸담고 있던 엔지니어였기 때문에 젠슨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시각화가 중요해질 컴퓨터 시장에 대해 세 사람은 갖은 상상을 펼쳐 놓았는데요. 하지만 막상 세 사람의
상상을 가능케 할 만한 하드웨어는 그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는 CPU가 실시간으로 그래픽을 구현하고 소환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죠 어쨌든 현재 시장의 한계와 앞으로 변화될 시장을 그리며 세 사람은 마구 상상력을 펼쳐 놓았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는 문득 그래픽 컴퓨팅이 가능해지려면 고속으로 이미지를 렌더링하는 복잡성을 처리할 수 있는 그래픽용 칩을 따로 만들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젠슨은 이 말을 듣자마자 "우리가 그걸 만들자"라며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사실 젠슨은 LSI LOGIC과 AMD에서 근무하는 가운데 컴퓨터 칩 산업에 대해 이미 내공이 많이 쌓인 상태였는데요. 크리스도 HP와 SUN MICROSYSTEMS에서 근무하면서 그래픽 및 시스템 아키텍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재였으며 커티스 역시 SUN MICROSYSTEMS에서 고속 메모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쌓으며 칩에 데이터를 빠르게 넣고 빼는 문제에 대해 능통한 엔지니어였죠
그러다 보니 세 사람이 뭉친다면 못할 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1993년 4월 5일 의지로 똘똘 뭉친 세 사람은 4만 달러의
자본금을 모아 회사를 창업했습니다. 앞으로 성공적인 그래픽 컴퓨팅의 시대를 여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시각적 경험을 만들고 싶다는 의미로 "부러움"을 의미하는 라틴어"INVIDIA"에서 이름을 따 엔비디아라는
회사명을 붙이게 되죠 그렇게 엔비디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4. 멀티미디어 시장
신생 기업 엔비디아가 창업했을 무렵 이들과 비슷한 미래를 그리던 회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PC업계의 거물이 된 인텔이었죠 1990년대 초 PC환경은 변혁의 정점에 있었는데요 한때 기업과 일부 컴퓨터 광인들을 위한 도구였던 컴퓨터는 이미 대중들의 멀티미디어 허브로 진화한 상태였습니다. 게임 산업에서도 픽셀화된 2D 스프라이트에서 3D 세계로 전환하고 있었죠 이처럼 쉴 새 없이 발전하는 컴퓨터 기술과 함께 PC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앞으로 바뀔 변화를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가 관건이 된 시기였습니다.
이때 여러 쟁쟁한 기업들 중 선두 주자로 나선 회사가 인텔이었습니다. 인텔은 IBM PC성장에 힘입어 X86 시스템 386, 486, 펜티엄 등)을 성공적으로 이끈 회사였는데요. 이미 CPU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지만 인텔은 한 발짝 더 나아가 또 다른 야망을 드러내고 있었죠 인텔이 노리는 다음 시장은 멀티미디어 시장이었습니다. 인텔은 그동안 독점했던 전통적인 데이터 연산뿐만 아니라 오디오 및 비디오와 같은 멀티미디어 작업도 문제없이 처리 가능한 멀티미디어 CPU를 구상하기로 하면서 NSP(원시신호처리) 기술을 발표했습니다.
인텔이 발표한 NSP계획은 CPU에 신호처리 기능을 추가함으로써 지금까지 별도의 프로세서를 필요로 하던 사운드카드나 그래픽카드 등의 기능을 CPU하나만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 계획이었죠. 어떻게 보면 만능 카드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NSP의 공개 이후 PC업계는 반응이 엇갈렸지만 엔비디아는 인텔이 발표한 NSP 계획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식당에서 구상했던 비전을 인텔이 똑같이 보고 있었으니까요 당시 엔비디아는 인텔과 비교할 거리조차 없는 신생기업이었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짓밟힐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는 인텔의 횡보의 자극을 받아 그래픽만을 위한 칩이 아니라 멀티미디어로 확장 할 수 있는 그래픽칩을 만들겠다는 사업의 방향성이 확실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막 시작한 엔비디아가 인텔을 따라잡을 수 있겠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셨나요? 사실 엔비디아를 창업한 젠슨과 크리스 커티스 역시 엔비디아와 인텔의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란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 무모한 일에 뛰어들 용기가 있었던 것은 한 가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인텔이 멀티미디어 시장의 성장성을 보고 기술 개발을 한다고 한들 그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CPU 안에서 그 모든 걸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거라 생각한 겁니다. 이 지점이 자신들에게 기회가 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엔비디아는 CPU가 아닌 올인원 멀티미디어 솔루션 개발을 목표로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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