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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스위스를 침공하지 못했던 이유

by bullhak 2024.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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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중립국입니다.
하지만 중립국이라 해서 모든 전쟁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는 중립을 선언한 여러 국가들을 침공하고 무참히 유린했습니다.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덴마크는 독일과 연합국 "그 어떤 편에도 서지 않겠다" 선언했지만 히틀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위스는 어땠을까요? 히틀러는 스위스만큼은 침공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중립국이라는 이유로 침공하지 않았다면 다른 중립선언 국가들을 침공한 것은 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 때문에 스위스만 건들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크게 스위스의 경제적 이점과
군사적 이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스위스의 경제적 이점

 

전쟁 시 필수 물자인 석유

석유 비축량은 전쟁의 승패를 가를 정도로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병사들을 전장으로 실어나르는 열차도 석유로 움직이고 공군의 핵심인 전투기도 석유로 움직이며 전차도 물론 석유를 원료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석유는 전쟁시 다방면으로 아주 요용하게 쓰이는데요 히틀러는 그만큼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중동 국가들과 거래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거래를 성공시킨다 하더라도 독일 화폐인 마르크화로는 구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마르크화의 가치는 매우 폭락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폭락정도가 아니라 아예 휴지 조각으로 전락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한 예로 마르크화로 빵을 구입하려면 2000억 마르크를 넘게 지불해야했으니 아예 화페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중동 국가들도 이런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마르크화로는 석유를 절대 팔지 않았겠죠 독일은 영국 화폐인 파운드로도 구입할 수 없겠냐 제안했지만 이 제안도 물론 거절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영국도 엄연히 전쟁에 참가한 국가였기 때문에 화폐의 가치가 안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국이 패전국이 된다면 파운드도 마르크처럼 폭락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중동 국가들은 어떤 화폐를 원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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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오래전부터 유럽의 기축통화로 기능하던 스위스 화폐인 프랑입니다. 당시 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유럽의 공식적인 중립국인 스위스의 화폐로 무역을 했습니다. 여러 나라가 사용하는 화페인 만큼 화페가치가 안정적이며 앞으로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 같은 국가의 화폐이니 중동 국가들이 프랑을 선택한 것 입니다. 그 결과 중동 국가들은 석유를 원한다면 반드시 프랑으로 지불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아무리 잘 나가던 히틀러라도 이 상황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독일은 자국 내에 있는 막대한 양의 금괴를 끌어모아 스위스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이 금괴들을 스위스 화폐 프랑으로 바꾸어 버렸죠 독일은 이렇게 확보한 프랑으로 중동 국가들에게서 석유를 수입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스위스의 경제적 이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히틀러가 스위스를 침공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스위스 화폐 프랑의 화폐가치가 떨어지면서 중동 국가들에게 석유를 구입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히틀러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죠 스위스는 신뢰할 수 있는 화폐라는 아주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위스의 군사적 이점

 

그렇다면 두번째 이유인 군사적 이점은 무엇일까요?
사실 중립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국의 국방력이 엄청나게 강해야 합니다 국방력이 강하지 않다면 다른 중립선언 국가들 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스위스는 이 점을 오래전에 깨닫고 항상 전쟁을 철저하게 대비해 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스위스는 유럽의 강대국 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이 위치는 강대국들이 지리적 이점을 생각하면 군침이 돌 수 밖에 없는 위치라고 할 수 있죠 실제로 스위스는 고대부터 국경을 맞댄 국가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며 생존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한 스위스는 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립국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스위스는 1815년 빈 회의에서 공식적인 중립국으로 인정받게 되는데요 실제로는 무려 1500년대 부터 중립국으로 인정받기 위해 정부는 물론 스위스 전국민이 애써왔습니다.
그 결실이 약 300년이 흐른 1815년에 나타나게 된 것이죠 그렇게 중립국이 된 스위스는 계속 중립국으로 남아 있기 위해 국방에 큰 힘을 쏟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시작한 시점 부터 독일의 침공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스위스는 자국 화폐를 기축통화로 쓰는 덕분에 유럽 각국의 자금 흐름을 알 수 있었는데 독일의 자금흐름이 군수물자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1930년대 초반이었는데 이때 부터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죠 실제로 전쟁이 날 것이라 정확히 예측한 정치가도 있었습니다. 바로 스위스의 초대 국방장관 루돌프 밍거입니다.


루돌프 밍거는 스위스의 재무장을 홀로 이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입니다. 그는 스위스 국민 중 16~19세 사이의 연령은 의무 군사교육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정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또한 전국을 순회하며 독일이 반드시 침공해올 것이라는 연설을 하며 국방에 대해 각성할 것을 국민들에게 촉구했습니다.
여기에 언론도 힘을 보태주는데요 언론이 신문 칼럼란에 파리 입성을 위한 독일군의 계획 분석이란 글을 게재한 것입니다.
그 칼럼은 '독일이 스위스를 침공할 경우 스위스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라는 정밀 분석까지 첨부되어 있어 스위스 내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1933년 스위스는 자국내의 분위기를 반영해 국방비를 10배나 증액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이 예산을 독일과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아주 적절하게 분배했죠 스위스는 예비군 체제라 인건비가 크게 들지
않으니 무기 구입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최신 소총인 K31 카빈 소총을 제식 소총으로 쓸 정도로 무기 구입에 열을 올렸죠 게다가 이것도 부족했나 싶었는지 같은 해 연말에 다시 한 번 국방비 예산을 크게 증액시키기도 했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아주 극단적인 조치까지 행해버리는데요 스위스 내에 있는 여러 조직들 즉 정당과 경제조직들의 정체성을 뒤바꿔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스위스 국민들이 하나로 뭉쳐 전시대비라는 한 목표를 향해 간다고 하더라도 여러 정당과 조직이 있는 이상 부딪힐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위스는 각 정당을 상징하는 마크를 모두 제거해 버리고 모든 정당과 경제조직들을 나치에 대항할 수 있는 투쟁 조직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실제 이름도 '파이팅 그룹'이죠 이렇게 변화된 정당들은 의회와 언론을 통해 토론을 개최하면서 국민들을 계몽시키는데 사력을 다했습니다. 결국 스위스 내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독일과의 전쟁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공통된 신념이 생기게 되었죠 파시즘이 생길 틈 조차 주지 않은 것 입니다. 이렇게 스위스는 국민, 정치인, 군인들 모두가 하나로 뭉쳐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게 되었습니다. 독일과의 접경지역엔 대전차 장애물,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1937년 부터는 독일의 공군, 공수부대 공격에 집중 대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방공호와 대피호를 대거 구축했는데
알프스 산 속에 2만 2천 개의 지하벙커 진지를 구축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방공호에는 모든 병사가 2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까지 비축해 놓았죠 결국 1939년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킵니다. 이에 스위스는 철저히 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국방비를 크게 증액시켰습니다. 그리고 전국에 동원령을 발동해 나라를 완전히 전시 체제로 전환시켜버렸습니다. 흔히 이런 것을 '전 국토의 요새화'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스위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물론 스위스는 독일에 대응할 수 있는 경제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혹시 모를 전쟁 또한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여겨 이렇게 까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독일은 1940년에 스위스를 침공할 계획을 아주 구체적으로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 계획을 '맹겔스 계획'이라고 하며 이어져 나온 계획의 이름은 '튀넨바움'계획이라고 합니다. 이 계획은 스위스를 침공하기 위한 군인의 숫자를 최소 30~50만이라며 정확히 명시해 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독일 육군 참모총장인 '프란츠 할더'는 이 계획을 실행하면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스위스가 독일군 침공에 대해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지고 있다고 보고하며 만약 계획을 실행할 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수뇌부에 전달했습니다. 또한 스위스의 40만 대군이 알프스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칠 것이라 예상하기도 했죠 결국 독일은 스위스 침공계획을 단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스위스는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이란 엄청난 재앙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죠 이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리고 오늘날 까지도 스위스는 자주국방에 막대한 힘을 쏟고 있습니다. 한 예로 아직까지도 스위스의 모든 남성은 병역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20세가 되면 18주 동안 신병교육을 받아야 하며 또한 6년간 매년 재소집되어 3주를 군대에서 복무해야만 합니다. 총 245일을 복무하게 되는 것이죠 '양심적 병역 거부'도 인정하고 있기는 한데 그들은 현역 병사들보다 1.5배나 많은 368일을 공공기관에서 일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국민들은 전시가 아님에도 집집마다 무기를 보관하고 군사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죠 이런 점들을 보면 스위스가 현재도 중립국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자주국방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립국으로 서기 위한 300년간의 노력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화폐 '프랑' 오늘날 까지도 자주국방을 목표로한 막대한 투자를 하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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